018 "아이 캔 스피크" 영화 리뷰 (웃음 속에 상처, 관계의 변화, 역사)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피해자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유쾌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접근해 관객에게 감동을 전한 영화입니다. 주인공 ‘옥분’ 할머니는 매일 구청을 드나들며 민원을 제기하는 동네의 유명인물이지만, 그 이면에는 말하지 못한 깊은 상처가 숨겨져 있습니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구청 공무원 ‘민재’를 찾아온 그녀의 요청은 단순한 학습이 아닌, 삶 전체를 건 간절한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며, 영화는 이 과정을 통해 진심 어린 감정과 역사의 무게를 함께 전달합니다.
| 아이 캔 스피크 영화 포스터 |
웃음 속에 숨겨진 상처, 옥분의 용기
영화 초반의 옥분은 고집 세고 다소 괴팍한 캐릭터로 그려집니다. 매일같이 구청을 찾아와 도로, 시설, 안내판 등 사소해 보이는 문제들을 집요하게 지적하며 민원을 넣는 그녀는 공무원들에게 ‘민원왕’으로 통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들 뒤에 숨겨진 그녀의 진심을 서서히 드러냅니다. 옥분이 왜 그렇게 사소한 것들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알게 되면, 관객은 그녀를 단순한 노인이 아닌, 상처와 사연을 가진 인물로 바라보게 됩니다.
옥분이 영어를 배우겠다고 나선 계기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나 취미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진짜 목적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감정적으로 깊어집니다. 그녀는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자신의 과거를 직접 증언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외국어 학습이 아니라, 오랜 세월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고통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준비였고, 영화는 이 소망을 유쾌하면서도 묵직하게 전달합니다.
옥분의 캐릭터는 기존 위안부 피해자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고통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며,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한 명의 시민으로 그려집니다. 이는 위안부 문제를 보다 넓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며, 피해자를 단순히 연민의 대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삶 전체를 존중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옥분의 용기는 그저 눈물 나는 과거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을 되찾기 위한 한 걸음이었습니다.
관계의 변화, 진심이 닿는 순간
옥분과 민재의 관계는 처음부터 매끄럽지 않습니다. 민재는 규칙과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주의 공무원으로, 민원왕 옥분을 마주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느낍니다. 반면 옥분은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왔고, 민재의 딱딱한 태도에 답답함을 느낍니다. 이처럼 서로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은 영어 수업을 매개로 조금씩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은 웃음과 감동이 교차하는 따뜻한 시간들로 채워집니다.
민재는 처음엔 귀찮은 부탁이라 생각하며 수업을 시작했지만, 점차 옥분의 진심과 삶의 무게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녀가 단어 하나하나를 외우고, 발음을 연습하며, 철저하게 준비하는 모습은 단순한 열정을 넘어선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민재는 그제야 옥분이 단순한 수강생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바쳐 진실을 말하려는 사람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돕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관계는 점차 교사와 학생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동반자로 발전합니다.
영화는 이러한 관계의 변화를 통해 '이해'란 시간이 걸리는 과정임을 말합니다. 누군가의 말과 행동 뒤에 숨겨진 이유를 알아가는 것, 그 과정을 통해 편견을 넘어서게 되는 것, 이것이 진짜 사람 간의 연결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옥분과 민재는 서로의 세계를 전혀 몰랐지만,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마음을 열고 진심을 나누게 됩니다. 이 과정은 특별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깊은 울림을 줍니다.
관객 역시 민재의 시선을 따라가며 옥분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영화는 누구나 타인을 오해하거나, 불편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오해를 풀기 위한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타인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지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섬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목소리를 낸다는 것, 역사를 잊지 않는 용기
영화의 후반부는 옥분이 미국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영어로 증언하는 장면으로 절정을 이룹니다. 그 장면은 단순한 연출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옥분은 수십 년간 마음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내며, 그것도 다른 이의 통역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전합니다. 이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대신 말해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 ‘말할 권리’를 되찾는 과정으로 묘사되며 큰 감동을 줍니다.
그녀의 증언은 많은 사람들을 울립니다. 단순히 고통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었다는 인간적인 존엄성과 삶에 대한 의지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피해자로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영화는 그 점을 강조하며,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단편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국한하지 않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를 조명합니다.
‘아이 캔 스피크’는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면서도, 그 기억을 후세와 세계에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단순한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라,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연대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영화는 유쾌한 전개 속에서도 뚜렷하게 전합니다. 옥분의 증언은 그래서 더욱 강력합니다. 영화는 과거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닌, 미래를 위한 목소리로 증언을 그립니다.
이 영화는 아픔을 직면하는 용기, 그리고 그 아픔을 세상에 전하는 진정한 의미의 '말하기'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그 목소리가 전해졌을 때 얼마나 큰 울림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 장면은 관객에게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여운을 남깁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웃음과 감동, 그리고 묵직한 메시지를 모두 담아낸 영화입니다. 위안부 문제라는 역사적 아픔을 피해자의 삶 전체로 확장해 바라보며, 그들이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존엄한 삶의 주체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세상에 말을 건넬 수 있도록 귀 기울이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합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세상에 말을 걸고 있습니다. 그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연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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