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건축학개론 영화 리뷰 (스무살, 기억의 틈, 감정의 구조)

‘건축학개론’은 많은 이들이 가슴 속에 묻어둔 ‘첫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장 잔잔하면서도 현실적으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단순히 첫사랑의 설렘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마주하게 된 감정과 그 거리감, 말하지 못한 진심을 통해 성숙해진 사랑의 형태를 보여줍니다. 영화는 추억이라는 이름의 건축물을 쌓아올리듯,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관객의 마음속에 오래된 감정을 조용히 불러냅니다.

건축학개론 영화 포스터

스무 살, 설계되지 않았던 감정의 시작

영화는 건축학과 신입생 승민이 캠퍼스에서 서연을 처음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두 사람은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조별과제를 함께 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말수 없고 내성적인 승민과 당차고 솔직한 서연의 성격은 대조적이지만, 오히려 그 차이가 두 사람을 더 끌어당깁니다. 그 시절의 감정은 순수했고, 계산되지 않았으며, 서툴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건축학개론’은 이 시기의 감정을 매우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대사 하나, 시선 하나, 심지어 함께 듣는 음악 한 곡에도 풋풋한 긴장감이 담겨 있습니다. 승민이 서연을 위해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달려가는 장면, 서연이 승민의 집에 찾아와 엉겁결에 시간을 보내는 장면 등은 모두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을 현실적으로 표현합니다. 관객은 이 장면들을 통해 과거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리게 되고, 그 기억의 감정선에 자연스럽게 이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감정은 미처 완성되지 못한 채 어긋나고 맙니다. 승민은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채 오해와 서툰 자존심 속에 거리를 두고, 서연 역시 그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한 채 멀어집니다. 이 시기의 사랑은 그래서 더 아프고, 더 오래 남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고,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기억되는 첫사랑. 영화는 이 미완성의 감정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합니다.

시간이 지나 마주한 진심, 기억의 틈 사이

시간이 흐른 뒤,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됩니다. 서연은 오래된 집을 고치기 위해 건축사무소를 찾고, 그곳에 승민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재회는 두 사람 모두에게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킵니다. 예전 감정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닌 애매한 감정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이 재회는 단순히 과거의 사랑을 회상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영화는 현재의 두 사람이 과거의 감정을 어떻게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승민은 여전히 조심스럽고 솔직하지 못하며, 서연은 더는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당당하게 표현합니다. 그 변화는 곧 시간의 흐름이 이들의 내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살아온 두 사람은 과거를 추억하며 다시 가까워지지만, 이전과 같은 감정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그 시절의 자신을 마주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완성되지 못했던 사랑을 다시 한 번 설계해보려는 시도. 하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과거를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기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건축학개론’은 이 과정에서 감정의 무게를 가볍게 다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하지 못했던 진심, 하지 못했던 행동,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이 얼마나 큰 의미로 남는지를 강조합니다. 사랑은 끝났지만, 감정은 여전히 사람을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조용히 보여줍니다. 결국 이 영화는 첫사랑이란 단어에 담긴 설렘과 아픔, 그리고 성장의 의미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추억의 집을 짓다, 감정의 구조를 복원하는 시간

영화 속에서 서연이 고치려는 오래된 집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녀의 과거이자 기억이며, 감정이 쌓인 공간입니다. 그리고 그 집을 설계하고 짓는 일은 곧 승민이 자신의 감정과 기억을 다시 들여다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집이라는 공간은 건축가에게 있어 구조적 완성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과거의 조각들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며, 감정의 흔적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서연과 승민이 함께 그 집을 설계하고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둘은 점점 더 솔직해지고 과거의 감정을 공유합니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어색하고, 때로는 아프지만, 그 모든 과정이 이들에게 치유가 됩니다. 과거에 머물러 있던 감정을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다시 바라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영화는 그 과정을 통해 두 인물이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건축학개론’의 진정한 매력은 이처럼 상징적인 공간들을 통해 감정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풀어낸다는 점입니다. 집이라는 구조물 안에는 그들의 기억과 감정,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벽돌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듯합니다. 관객은 그 공간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추억을 떠올리게 되고, 그것이 영화가 주는 가장 큰 감동 중 하나입니다.

결국 그 집은 완성되고, 두 사람은 각자의 길로 떠납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그 시간을 이해하고 품은 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사랑의 완성이 꼭 함께 하는 미래가 아니라, 감정의 이해와 정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첫사랑의 기억이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만든 중요한 조각임을 잊지 않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건축학개론’은 누구나 가슴에 품고 있는 첫사랑의 기억을 조용히 꺼내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완성되지 않았기에 더 선명하고, 지나갔기에 더 아름다운 감정. 이 영화는 그 감정을 다시 들여다보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기억’ 속에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한때의 감정을 꺼내보고 싶을 때, 이 영화가 그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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